메이웨더-파퀴아오, ‘세기의 대결’ 수식어 민망했던 ‘주먹 펜싱’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뉴스 프로그램 코너 가운데 하나인 JTBC ‘앵커 브리핑’에서 오늘 손석희 앵커가 오늘의 주제로 삼을 만한 속담이 있다면 ‘소문난 잔치 먹을 것이 없다’가 아닐까.
물론 ‘앵커 브리핑’에서 스포츠를 이야기 소재로 삼는 일을 본 적은 없지만 만약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매니 파퀴아오의 경기를 코너의 소재로 삼는다면 말이다.
그랬다. 예상했던 경기 상황의 가능성 가운데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펼쳐지고 말았다.
3일 낮(한국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세계복싱평의회(WBC)·세계복싱기구(WBO)·세계복싱협회(WBA) 웰터급(66.7㎏) 통합 타이틀전에서 메이웨더는 파퀴아오를 12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이기고 48연승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이날 경기는 정오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이 경기를 이른바 ‘페이퍼뷰(Pay-per-view)’라고 하는 보려는 유료 결제 TV를 통해 시청하려는 가구들의 결제 신청이 폭주하면서 페이퍼뷰 결제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처리시간을 요구하는 케이블 업체(HBO와 쇼타임)의 요청에 따라 경기 시간이 40분 가량 지연이 됐다.
그렇게 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우다 못해 재가 되기 직전까지 몰고 간 끝에 시작된 경기. 하지만 그 내용과 결과는 그야말로 ‘먹을 것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소문난 잔치’였다.
전반 6라운드까지 경기 내용은 그런대로 후반부 6라운드에서 펼쳐질 대혈투를 기대하게 하는 여러 징후들이 보였지만 9라운드가 끝났을 때 그런 기대는 실망감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11라운드가 끝났을 때는 그 오랜 시간 이 경기를 기다려온 자신에게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12라운드 내내 파퀴아오는 뭔가 큰 펀치 한 방으로 메이웨더를 눕혀보겠다는 듯 리딩 펀치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메이웨더를 링 코너로 몰고 다니기 바빴다. 간간이 몇 개의 펀치가 성공이 되면서 메이웨더에게 연타를 날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펀치는 메이웨더의 커버링에 막혔고, 파퀴아오의 복부공격은 메이웨더의 스피드를 잡는데 실패했더다.
메이웨더는 그런 파퀴아오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자신의 펀치 사정권 안에 파퀴아오가 들어오면 적중률 높은 잽으로 포인트를 쌓아갔다. 포인트를 쌓기는 했지만 그 펀치의 강도는 파퀴아오에게 어떤 충격도 안겨주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엄청난 관심에도 불구하고 12라운드 36분 내내 그야말로 싱겁디 싱거운 내용의 경기가 펼쳐졌고, 마침내 두 선수는 부심 세 명의 채점 결과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 부심들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세 명의 부심으로부터 나온 판정 결과는 이들이 각자 결론을 내는 데 그리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음을 읽을 수 있었다. 데이브 모레티는 118-110, 글렌 펠드만과 버트 클레멘트는 나란히 116-112로 메이웨더가 파퀴아오보다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고 판정했다.
기자 개인적으로는 경기 내용만을 놓고 보면 적극성에서 앞선 파퀴아오가 그나마 근소한 우세를 보인 경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소가 필리핀이 아닌 미국이라는 점과 메이웨더가 47전 무패에 5체급 석권에 빛나는 미국인 챔프라는 점을 종합했을 때 승패에 대한 판정은 메이웨더가 승리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심에 따라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력에 4-8점의 격차를 판정했다는 부분은 분명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채점을 담당한 부심들이 기계의 힘에 의존해 채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로지 두 선수의 주먹이 성공된 ‘숫자’ 만을 오로지 판정의 기준으로 삼았어야 그런 점수차가 나올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싱이라는 경기가 가진 묘미와 이날 경기에 대한 복싱 팬들의 기대를 종합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날 경기에서 메이웨더가 파퀴아오를 4-8점차로 이겼다는 그 판정은 결국 메이웨더가 파퀴아오보다 복싱을 잘했다기 보다는 ‘주먹 펜싱’을 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에는 ‘세기의 대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수식어는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보다는 ‘세기의 주먹 펜싱’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결국 전세계 약 40개국 스포츠 팬들은 36분간의 ‘주먹 펜싱’을 보기 위해 장장 6년이라는 시간을 애태우며 기다린 셈이다.
두 선수의 대결을 내심 긴장하면서 지켜봤을 UFC의 데이나 화이트 회장은 이날 금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복싱이 거품이 잔뜩 낀 그저 그런 콘텐츠인 반면 UFC의 종합격투기는 그야말로 거품 없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내지 만족도)’ 최고의 콘텐츠라는 인식을 심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레퍼런스를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로부터 제공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웨더는 케이블 업체 ‘쇼타임’과의 계약에 따라 올 가을에 한 차례 더 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상당수 팬들은 올 가을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재대결을 보기를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재대결 성사 가능성 자체부터가 희박하기도 하거니와 두 선수의 첫 대결이 이런 정도의 실망스러운 내용이라면 가을에 두 선수의 재대결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그 대결이 이번만큼 엄청난 ‘머니 게임’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두 선수 모두 여전히 대단한 복서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지만 두 선수의 대결이 돈이 될 만한 카드가 아님이 이번 경기를 통해 확실하게 증명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