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이영표, 정신력 개념에 관한 '일맥상통'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히딩크 감독은 대내외적으로 한국 축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인식을 송두리째 흔드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것은 바로 “한국 축구는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는 말이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말은 그 동안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서 축구 선진국 대표팀과 펼친 경기에서 번번이 선수 개인의 기량이 모자라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다소 생경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히딩크 감독의 ‘파워 프로그램’ 덕분에 한국 대표팀은 전후반 90분 내내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체력을 바탕으로 세계적 강호들을 줄줄이 격파하고 4강에까지 올랐다.
“한국 축구는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는 히딩크 감독의 말이 사실로 입증이 된 셈이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에도 한 가지 한국 대표팀에 대해 붙은 평판 가운데 히딩크 감독도 별로 다른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은 한국 선수들의 정신력이었다.
체격 조건이 월등히 좋은 유럽 선수들과도 거친 몸싸움과 신경전을 마다하지 않고,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피로가 누적된 상황에서도 그라운드에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투혼 내지 투지가 한국 축구의 최대 미덕이라는 데 대해 히딩크 감독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브라질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한국 축구의 최대 미덕이라는 정신력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고 있다.
홍명보 대표팀 감독은 지난 11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세인트 토머스 대학교에서 마지막 훈련을 끝낸 뒤 취재진과 만나 "축구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는 데 대체 정신력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홍 감독은 "예전에는 정신력이 한국 선수들의 특징으로 손꼽혔지만 먼저 실점하고 나서 정신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나 역시 그런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본적으로 경기에 나서기 전에 정신적인 무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 "지난 두 차례 평가전에서 볼 수 있듯이 좋은 경기를 펼치다가 실수로 실점하는 부분을 고치는 게 급선무"라고 덧붙였다.
결국 선수들의 집중력을 강조한 말이었다.
이번 브라질월드컵 기간 중 KBS 축구해설위원으로 활약하게 된 이영표 위원도 과거 한국 축구의 정신력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그는 지난 2012년 5월 <스포츠동아>에 기고한 칼럼에서 “(2002 한일월드컵이)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오해는 ‘한국축구는 유럽축구보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흔히 상대를 거칠게 다루거나 부상당한 머리에 붕대를 감고 뛰는 것이 정신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멘탈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멘탈, 즉 정신력에 대해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 섰을 때나 혹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를 앞두고 밀려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며 “약한 상대를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경기장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또 졌을 때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을 묵묵히 이겨내는 것, 이겼을 때 쏟아지는 칭찬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것도 모두 멘탈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완벽한 기술로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유럽축구를 쉽게 접하는 국내 축구팬들 중 일부는 ‘이제 우리도 정신력 타령 그만하고 기술 축구 좀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유럽축구의 환상적인 플레이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강력한 멘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 하다고 말하고 싶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하나같이 멘탈을 언급하는 이유도 박빙의 경기에서 경기 결과를 바꾸는 가장 큰 힘은 기술이나 전술이 아니라 바로 멘탈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결국 이영표 위원도 정신력이라는 개념을 과거 한국 선수들이 발휘했던 정신력과는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한국 축구가 지닌 정신력이 소위 ‘깡’으로 대변되는 정신력이요, 육체적인 한계 상황을 이겨내는 정신력이었다면 오늘날 한국 선수들이 가져야 할 정신력은 연습 과정에서 익힌 전술과 개인기량을 실전에서 온전히 펼쳐 보일 수 있는 평정심과 집중력이라는 사실을 칼럼을 통해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홍명보 감독이나 이영표 위원 모두 과거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로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졌던 정신력이라는 요소가 지금 시점에서 축구 선진국 선수들이 가진 정신력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한국 선수들이 갖춰야 할 정신력의 성격이 선진국형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