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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이야기] 박시헌은 정말 로이 존스의 금메달을 훔쳤을까

JACK LIM 2012. 7. 1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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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발생한 스캔들가운데 으뜸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육상 남자 100m 결승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칼 루이스를 제치고 세계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가 나중에 금지약물 복용사실이 적발되면서 금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의 스캔들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선수 가운데서도 벤 존슨 못지 않게 서울올림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선수가 있다.

 

그는 바로 복싱 라이트미들급에서 한국에 마지막 금메달을 안기며 한국이 서울올림픽 종합 메달순위에서 4위라는 경이적인 순위로 올라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박시헌이라는 선수다.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은 복싱에서 플라이급에 출전했던 김광선, 라이트미들급의 박시헌 두 명의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김광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승후보였다. 1984 LA올림픽에서도 우승후보로 기대를 모았지만 충격적인 1회전 탈락을 경험했지만 이후 절치부심다시 4년을 기다려 마침내 조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옥동자와 같은 금메달을 따냈고 언론이나 팬들의 반응도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하지만 박시헌의 금메달에 대한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마치 드러내놓고 사랑을 주기 어려운 사생아취급을 받았던 것이 박시헌의 금메달이었다.

 

사실 박시헌은 서울올림픽에서 주목받던 선수가 아니었다. 그가 결승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박시헌이 누구냐며 궁금해 했다. 그가 월드컵 등 주요 국제대회 우승경력이 있고, 나름대로 아시아권에서는 정상권의 선수였지만 그의 체급이 서양 선수들이 강한 중량급이었던 탓에 그의 결승진출은 이변에 가깝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 속에 박시헌은 그야말로 예상 밖의 금메달을 따냈고, 그의 금메달 덕분에 한국은 종합메달 순위에서 4위로 치고 올라갔다. 그렇다면 다른 금메달보다 더 사랑 받았어야 하는 금메달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결승전 경기 내용에 대한 논란 때문이었다.

 

김광선이 결승 상대였던 동독의 안드레아스 테우스를 상대로 비교적 압도적인 경기(4-1 판정승)를 펼쳤던 반면 박시헌은 미국의 아마추어 복싱 스타 로이 존스를 맞아 다소 열세로 보인 경기를 펼치고도 근소한 승리(3-2 판정승)를 거뒀다.




 

당시 최종 판정 직전 미국 중계진의 방송화면에는 로이 존스의 유효타가 박시헌의 유효타보다 2배 넘게 많은 것으로 분석된 화면이 나갔다. 하지만 주심의 손은 박시헌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이후 미국 언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외신은 로이 존스가 박시헌에게 금메달을 강탈당했다는 식으로 보도를 내보냈고, 국내 언론들은 이 같은 외신 반응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당시 박시헌의 경기내용을 박시헌의 승리로 옹호해 주는 국내 언론이나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이 박시헌의 금메달을 보는 시각도 자연스레 민망함내지 부끄러움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논란은 이어졌고, 결승에서 패한 로이 존스 측는 IOC에 이날 경기결과에 대해 제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시헌은 당시 판정 직전 스스로도 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술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수들은 경기를 치르고 나면 승패를 스스로 직감한다고 한다. 박시헌도 스스로 졌다는 사실을 직감한 셈이다.

 

하지만 박시헌은 자신의 승리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 다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시헌은 뜻밖으로 자신의 손이 올라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홈 어드밴티지가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여겼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대다수 국내외 언론의 생각과는 달리 박시헌 스스로는 졌지만 완패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실제 경기내용은 어땠을까?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본 당시 결승전 장면을 보고나니 박시헌이 근소한 패배를 생각할 만한 경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회전은 서로 탐색전을 펼쳤으니까 누가 우세했다고 보기 어렵다. 2회전에서는 로이 존스가 박시헌에게 스탠딩 다운을 뺏기도 했지만 그 스탠딩 다운 판정은 박시헌이 심판의 카운트 중에도 항의했을 만큼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그보다는 스탠딩 다운 직전 박시헌이 로이 존스를 밀어붙인 장면이 더 눈에 띄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은 역시 마지막 라운드였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로이 존스가 라운드 초반 유효타를 몇 개 성공시켰지만 박시헌은 마지막 1분동안 경기를 주도했고, 상당수의 유효타를 성공시켰다. 당시 판정이 3-2 박시헌 승리였는데 그런 판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박시헌이 마지막 1분 동안 펼친 공격적인 경기가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홈 어드밴티지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과거 한국 복싱이 원정 올림픽 무대에서 홈텃세에 희생됐던 수 많은 상황들을 떠올려 보면 그런 정도의 홈 어드밴티지는 당시 분위기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로이 존스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다면 박시헌을 그로기 상태에 빠뜨린다든지 하는 좀 더 확실한 우위를 보여줬어야 했다.

 

어쨌든 그 문제적 경기이후 박시헌과 로이 존스의 인생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로이 존스는 프로로 전향, 메이저기구 4체급 석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반면 박시헌은 그 이후 프로데뷔도 못해보고 쓸쓸히 글러브를 벗었다. 그리고 대중들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 그는 현재 국내 최대 인터넷 복싱 카페를 운영중이다. 뒤늦게나마 복싱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복서로서의 인생은 로이 존스와는 비교대상이 안 된다. 복서로서 궁극적으로는 로이 존스에게 완패를 당한 셈이다. 박시헌이 복서로서 완패를 하는 데 있어 우리의 비뚤어진 시선이 치명타가 된 것은 아닌지 새삼 미안해진다.

 

박시헌은 과연 로이 존스의 금메달을 훔쳤을까? 단언하건대 그는 로이 존스의 금메달을 훔치지 않았다. 이제라도 박시헌의 당시 금메달이 온전하게 그 명예를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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